심포지엄
(2017년 12월 9일, 장소: 도쿄 베르사루 쿠단)
공개 토론회
토론회 참석자
구키 이에타카 (구마노혼구타이샤 궁사)
우에시마 케이지 (종교인류학자
사회(히라노키카쿠샤: 히라노 아쓰시 대표)
그럼 지금부터 공개토론회 ‘세계유산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의 본질을 고찰하다’를 시작하겠습니다.
세계유산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이 다른 세계유산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요시노, 고야, 구마노 즉 슈겐도, 불교, 신도 등의 각각
다른 종교의 성지가 이 지역에 공존하며 그곳들이 참배길 등의 고도로 연결되어 지금까지도 종교 활동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기이반도에 위치한 세 곳의 영지인 요시노, 고야, 구마노에서 귀한 분들을 모셨습니다. 이분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또한 이번 토론회에는 홍일점 게스트로 십수 년간 분재 연구는 물론 일본 신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신 가와사키 히토미 씨가 참석해
주셨습니다. 청중을 대표해 대종교가이신 세 분과는 다른 입장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종교인류학자인 우에시마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시겠습니다.
우에시마
사회자께서 소개해 주신 것처럼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에는 고야산과 구마노산잔, 그리고 요시노/오오미네 등
각각 다른 종교의 성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성지가 참배길 등의 고도로 연결되어 있어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인의 정신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각기 다른 종교가 길로 연결돼 참배자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현상은 일본을 제외하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예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러한 점은 일본의 풍토가 얼마나 다른 종교에 관용적인지, 각각의 종교가 서로의 가르침에 대해 얼마나 경애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이 산지가 교리를 초월한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자면 이 지역에는 전 세계의 다양한 문명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토론회에 참가하신 여러분께 세 곳의 성지 소개와 함께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고야산의 무라카미 씨부터 해주시죠.
<각 성지의 소개 등을 포함한 자기소개>
무라카미
무라카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기소개를 겸해서 고야산과의 관계를 한 사람당 7분, 럭키세븐인데… 그 시간 내에
끝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장내 웃음)
제 경력란에 야마구치 대학교라고 쓰여 있는데 사실 저는 야마구치 대학교에서 고야산 대학교로 옮겼습니다. 그 이유는 원래
저는 유럽 철학과 윤리학을 전공했습니다. 우에시마 선생님은 종교학은 돈벌이가 안 되지만 윤리학이라면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하셨지만, 윤리학도 마찬가지로
먹고살긴 힘듭니다. 철학도.
(장내 웃음)
저는 야마구치 대학교에서 윤리학을 전공하면서 루소와 니체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연구를 하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종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믿었습니다. 기독교에서 신은 하나입니다. 일본처럼 800만이나 되는
수많은 신을 뜻하는 야오요로즈노카미가 아닌 거죠. 오늘도 그런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독교에서는 절대신, 즉 신은 하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하나이죠. 진리도 하나, 답도 하나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용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독교가 피부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냄새라든지, 피라든지, 피부라든지 그런 감각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럽
사상의 근본에는 이런 기독교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인이 기독교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기독교인이 될 수는 있습니다. 신자가 될 수는
있지만 역시 전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읽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알 수 있느냐. 잘 모르는 거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설명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가
되고 육신이 된다는 부분이 피부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면 역시 불교구나 싶었습니다. 불교가 피부에 훨씬 잘 와닿는 느낌이 들어서 고야산 대학교로 학교를 옮겨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고야산의 개창자인
구카이(774-835)의 사상 연구를 시작했는데 처음엔
가로로 세로로 적힌 한자뿐이었습니다. 처음 경전을 봤을 땐 새까만 봉이 늘어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장내 웃음)
하지만 그렇게 경전을 읽으면서 연구하다 보니 구카이의 사고방식에서 이건 ‘알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안다, 모른다는 감성의 문제인데 감각적으로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인인 구카이의
감성이 저에겐 맞았던 거죠. 그리고 연구를 거듭해 가면서 역시 ‘교(수행)’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3년 후 다른 곳에서 공부했죠. 일본 내 유학을
두 번이나 한 사람은 없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던 도중 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야산 대학교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1990년의 일입니다.
7분이 지난 관계로 일단 여기까지.
우에시마
교학부장을 하셨죠, 교학부장이 제일 힘 있는 자리 아닌가요?
무라카미
우에시마
아니죠(웃음)
.
구마노혼구타이샤라고 하면 국내에 4000곳이나 되는 구마노 신사의 총본사입니다. 2001년부터 궁사를
맡고 계십니다.
(박수)
먼저 여기 계신 많은 분은 요시노, 고야, 구마노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것이고, 구마노의 우에시마
선생님과 다나카 씨, 무라카미 선생님 등이 여러 곳에서 세계유산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에 대한 강연을 하시는데… 실례지만 이번에 이런 포럼에 처음 오신 분 계시면
손을 들어봐 주시겠습니까?
(회장 거수)
좀 전 구마노의 대표라는 식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만 알고 계신 대로 구마노는 ‘구마노산잔’을 말합니다.
야마가타현의 산잔과는 달리 구마노산잔에는 각각의 신사에 궁사가 있습니다. 배포 자료에도
있지만 저는 구마노혼구타이샤에서 궁사를 15~16년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폭포를 볼 수 있는 구마노나치타이샤. 이곳에는 현재
‘오토코나리’라는 궁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구시에 있는 구마노하야타마타이샤에는 ‘우에노’라는 궁사가
절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구마노산잔은 각각 다른 3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요시노, 고야, 구마노도 그렇지만
저는 현 세대에 이렇게 하나로 만드는 기술이라고 할까요, ‘융합’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신불습합이나 신불분리라는 이야기도 나오겠지만, 저는 지금 이 시대 속에서 요시노, 고야, 구마노의 융합이
담당하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주변이 없지만 제 나름대로 구마노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잘 부탁드립니다.
우에시마
구키
구마노나치타이샤는 나치 오타키를 신체로 삼고 그곳에 히로 신사를 세웠습니다. 나치타이샤를
참배하는 분들은 오른쪽에 보이는 높이 133미터의 폭포 쪽으로 걸어가 그곳을 향해 절합니다. 이 나치 오타키는
제1폭포로 산중에
제2폭포, 제3폭포가 있습니다. 또한 구마노하야타마타이샤에는
가미쿠라 신사라는 섭사가 있어서 구마노나다에 면한 언덕 중첩에 위치한 거암 고토비키이와에 금줄인 시메나와를 걸어 신체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거암 신앙은
하나노이와야 신사와 아카쿠라 신사, 고노우치 신사 등에서도 나타나는데, 이와쿠라라고
불리는 거암에 신이 강림했다고 보고 그것을 신체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에시마
구키
우에시마
구키
본전은 1889년 수해 때 재빨리 당시의 선임께서 현재의 본전 장소를 경내지로 결정해 1년 8개월 후에 지금의
장소로 이전해 현재의 본전이 되었습니다.
4, 5년 전에도 엄청난 수해가 발생해 즈이호덴이라는
회관이 전부 무너졌는데 본전 건물은 다행히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빠른 결단 덕에 피해를 면할 수 있었지요.
우에시마
구키
또한 1889년에도 그런 수해가 있었지만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발 빠른 대처로 본전을 지금의 모습대로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에시마
본인이 직접 말씀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다나카 씨는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이 세계유산에 등재되기까지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분입니다. 요시노의 긴푸센지에서
오랫동안 일하셨고 집행위원장과 종교총장 등을 역임하시고 지금은 초우로(대승정)라는 직책에
있으신데 평소에는 아야베에 주지로 계신 절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박수)
하지만 좀처럼 진행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편 제가 있었던 요시노의 긴푸센지라는 절에도 역사적인 것들이 많은데,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 있었습니다. 이걸 이전처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순 없을까 라는 생각으로 가장 마지막에 세계유산 등재에 손을
들었습니다.
요시노/오미네가 손을 들면서 이 세 곳이 하나로 묶여 2004년 세계유산에
등재되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없었다면 2004년은 아마 힘들지 않았을까, 어쩌면 다른
형태로 진행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4년 반 만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것으로 (TV 광고의) 캐논(Canon)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요시노/오미네와 긴푸센지를 소개드리자면 간토에 계신 분은 야마부시를 본 적이 없는 분이 대부분이라 이미지를
떠올리는 게 쉽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고, 오늘은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나라현 출신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제작한 긴푸센지 홍보영상을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가와세 감독 앞에서 45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떠들었는데 영상에는 겨우 4초만 나옵니다.
(장내 웃음)
(비디오 상영)
우에시마
다나카
우에시마
다나카
다나카
(장내 웃음)
(박수)
다나카 씨, 슈겐도라는 종교가 어떤 것인지 간단히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나카
두 번째 특징은 ‘종파를 초월한 실천주의’라는 점입니다. 슈겐이라는 것은
실수실험 혹은 수행득험이라고 합니다. 수행을 함으로서 신통력인 겐리키(험력)를 얻습니다. 그 겐리키가
신의 계시 또는 스스로의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종파를 초월’했기 때문에 불교의 다른 종파 사람과도 함께 수행하고 신관과 함께 걷기도 합니다. 그런 넉넉하고
깊은 덕이 존재합니다.
세 번째 특징은 ‘신불혼효의 다신교적 종교’라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수)
가와사키
소개 감사드립니다. 교토에서 분재 연구를 하고 있는 가와사키 히토미입니다. 오늘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분재 연구를 하고 있는데 분재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키우는 즐거움’과 ‘감상하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분재를 한다고 하면 ‘분재를 몇 점이나
가지고 계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데 이건 키우는 즐거움이 더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재를 키우는 일은 바쁜 시기에는 매일 물 주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가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쁜
분들도 감상하는 즐거움을 알고 계시면 분재를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사진)은 약 200년 된 흑송
분재입니다. 수령 100년 이상을 넘긴 것을 전승 분재라고 하는데 분재 전람회에는 이런 분재가 다수 출품되기 때문에 저는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추천합니다.
그러면 분재란 무엇인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공개된 정보 중 가장 알기 쉬운 정의를 소개하겠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초목을 화분에서 재배하는 것이지만
통상, 화분에서 키운 초목을 산수의 분위기가 나도록 수자와 배치를 고려하면서 키우는 것을 가리킨다. 예술성이 높은
원예의 분야. 개인마다 다른 분재관의 차이도 있어 정의는 복잡하지만 하나의 식물이 수백 년간 계승되는 장대한 원예라는
점은 분명하다.’ (모리 카즈오, 동아시아 야생생물 연구회)
정의에 한 말씀 더 덧붙이자면 저는 분재와 화분 식물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분재는 자연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을 표현할 때 단순히 자연을 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재를 만들
때 중요한 점은 ‘소나무보다 더 소나무 같이’ 표현한다는 생각입니다. ‘소나무다움이란
무엇인가’, ‘자연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만드는 사람의 자연에 대한 해석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표현이 들어간 점이 화분 식물과 분재의 중요한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한정된 화분 안에서 식물이 장수하기 위해서는 선순환적인 생태계의 모습을 가져와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화분
내 환경을 미생물이나 박테리아까지 재현한다는 뜻인데, 이런 생각이 분재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분재는 예술인가 원예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정답은 둘 다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Arts & Science’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자로 표기했을 때는 ‘園藝’가 되는데 이걸로 이해해주시면
분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현대 분재라는 타이틀을 걸고 활동 중입니다. 2017년 4월 사이타마현에서 ‘세계분재 대회’라는 큰 대회가
열렸는데 이는 비즈니스 키워드로도 사용되어 다양하고 새로운 분재와 분재풍 작품이 발표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연구
대상을 판단할 때 기준이 되는 세 가지 포인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 자연에 대한 경의가 있는가.
하나, 장수. 생명의 연장이 이뤄지고 있는가.
하나, 작은 거목의 구조를 갖고 있는가.
제 활동의 목적은 ‘분재에 대한 오해를 풀자’는 점에 주안을 두고 있습니다. ‘분재를 하고
있다’라고 하면 ‘오래된 일, 옛날 걸 하고 계시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분재의 역사는
길지만 생명체이기 때문에 생명 연장의 면에서 보면 의료와 같은 테마를 가지고 있어 첨단의 것을 받아들이면서 나날이 발전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분재를
첨단의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에시마
가와사키
왜 중국에서 분재가 시작되었는지 살펴보면 중국의 민간신앙 중에 도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교의 신선사상
가운데 선인을 목표로 도사가 수행하면서 선인이 있는 선향 혹은 도원경의 이미지를 구현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을 2차원으로 표현한 것이 ‘산수화’입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3차원 즉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훗날 ‘원림’이라 불리며 ‘정원’이 됩니다. 이상향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분상, 즉 화분 위에서
이상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분경’입니다.
이런 점에서 분경, 분재는 종교미술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중국의 분경은 일본 헤이안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사진)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분재 사료인 ‘사이교모노가타리에마키’입니다. 이렇게 일본에
전래된 초기에는 중국의 분경을 모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석대라 불리는 목제 대 위에, 지금으로 말하면
돌 위에 심긴 분재라는 것인데 돌에 목초를 심어 가꾸는 형태가 애호되었습니다.
또 한 점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가스가타이샤에 전해지는 ‘가스가곤겐겐키’입니다. 이 그림은 귀족의
정원을 그린 것인데 좀 전에 본 그림과 같이 중국에서 전해진 분경을 옮겨놓은 듯한 형태로 석대 위에 돌 위에 심긴 분재와 분석, 두 개의 화분이
놓여 있습니다. 당시에는 분재라고 하지 않고 분산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볼 때 처음에는 중국의 분경을 그대로 묘사하다 점점 일본 특유의 형태로 변천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351년 남북조시대, 즉 앞선 그림들보다
약 50년 후의 작품인 ‘보키에코토바’인데, 이 그림을 보면
지금의 화분 식물 즉 나무와 화분의 스타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분재와 흡사한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사진)입니다.
왜 이 포럼에 분재 전문가가 있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제 스스로는
이러한 형태로 분재와 종교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분재는 각양각색의 취향이 존재하는 세계인데요.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보편적 가치관으로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좋다는 골동적 가취관, 장수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장수성의 부분이 흔히 말하는 신목, 거목 신앙이라
불리는 애니미즘의 신앙이나 감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불습합은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연구하기 쉽지 않은 분야입니다. 오늘은 여러 귀한 조언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에시마
<성지와 길>
다나카
(장내 웃음)
우에시마
그런데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다나카
그 원인은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이라는 제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이 산지라는 이름은 기슈와 이세에서 따 왔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고야도 요시노도 해당되지 않지요. 그리고 자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세 개의 현에서 제작한 심벌마크가 3개의 산 모양입니다. 누가 봐도 구마노산잔
쪽에서 본 기이반도의 모습을 그린 것이지요.
(장내 웃음)
그런데 이게 분명 구마노 고도와 초이시미치는 참배길입니다. 하지만 오미네오쿠가케미치는 참배길이 아니라 수행의
길입니다. 그런 곳을 참배길로 만들면 곰의 먹이가 되고 마니까요.
(장내 웃음)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불만이 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자주 했습니다.
우에시마
다나카
(장내 웃음)
우에시마
다나카
구마노에서 요시노를 향해 걷는 길을 순봉(순봉 수행), 요시노에서 구마노 쪽으로 걷는 것을 역봉(역봉 수행)이라고 하는데, 샤카가타케 북쪽에는
그 경계가 되는 료뷰와케라는 참배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북쪽의 요시노 쪽을 곤고카이(남성적 세계를
상징), 남쪽의 구마노 쪽을 다이조카이(여성적 세계를
상징)라고 합니다. 이들이 어우러져 성스러운 것이 완성되는데, 이 밀교적인
세계관 속에서 수행자가 수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산맥 중에는 운젠다케, 샤카가타케, 다이니치다케
등 불명이 붙여진 산이 많아 만다라의 세계를 걷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에시마
무라카미
(장내 웃음)
(장내 웃음)
고야산으로 가는 길은 7개가 있습니다. 물론 그 주변에 이런저런 별 볼 일 없는 길도 많이 있습니다.
(장내 웃음)
기노강을 출발해 고야산을 올라가는 초이시미치. 이곳은 구카이가 고야산을 발견하고 내려온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시노 쪽에서
출발해 고야에 도착한 후 아마노 쪽으로 내려갑니다. 니우쓰히메 신사 쪽으로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이 길을 지나갔을 겁니다.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또 하나 구마노혼구타이샤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고헤지라는 길입니다. 저는 이 두
길을 가장 먼저 걸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기록을 해두고 그 내용을 지역에서 월 2회 발간하는 진언종(신곤슈)의 종교신문
‘고야산시보’에 ‘고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습니다.
원고료를 모아 다 함께 걸은 후에 온천에서 한 잔 하기도 했고… 그렇게 하면 계속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5년 정도 이곳저곳을
걸었는데 그걸 바탕으로 쓴 것이 고야산과 관련된 세계유산의 원래 원고입니다.
그때는 세계유산까지는 생각도 못 했지요. 그저 신앙과 길을 즐겁게 걷자는 거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죠, 시간 몇 분 지났죠?
(장내 웃음)
그 길을 이곳저곳 계속 걷다 보면 고야 스카이라인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우선
고도가 끊어지는데 다행히 오네미치라는 곳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는 특히 가을 풍경이 멋진데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지니까 뻥 뚫린 시야로 내다볼 수 있습니다.
그곳을 걷다 어떤 소리가 들려와 가까이 가 보니 불도저가 있었습니다. 고도를 없애고
있었죠.
그 뒤에 세계유산인데, 그럼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정말 실망했었습니다.
제가 걸었던 그때가 고도를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좋은 부분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 쓴 것이 기록의 시작이었습니다. 세계유산 등재의 중심인물은 다나카 리텐 씨고 저는 그분에 전혀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고야로 가는
길에 있는 5~6개의 고도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고야산 측에서는
세계유산 등재 때 그 부분이 큰 도움이 됐다고 이야기하셨고 오늘도 그런 이유로 이 자리에 초대받았습니다.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의 본질에 대해서는 종교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이상입니다.
우에시마
구키
구마노 고도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자면 구마노 신앙의 확산과 함께 오사카에서 와카야마현 다나베시까지, 또 구마노혼구타이샤와
구마노하야타마타이샤를 잇는 길에 오지라고 불리는 사당이 99(실제로는 더 많음)곳 지어졌습니다. 지금도 이정표를
대신해 여정의 안전을 기원하는 도조신으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우에시마
구키
확산의 또 다른 요인으로 후다라쿠토카이를 들 수 있습니다. 구마노는 남단에 위치해 남쪽의 정토를 목표로 한
후다라쿠토카이의 수행은 문헌상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868년부터 에도시대까지 행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배가 흑조로
떠내려간 후 구마노 신불을 모셨다는 전설도 남아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류큐 8사 중 7사가 구마노의
권청입니다. 지바, 후쿠시마, 아이치 등 구마노 신사가 바다 근처에 많은 것도 특징 중 하나인데 가장 많은 곳은 지바현으로 약 270사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중세시대 전국 각지의 유력자로부터 사유지인 장원이 봉납되었는데 그 장소에 구마노가 권청된 경우도 있습니다.
우에시마
무라카미
사실 걷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 예를 들어 11세기경 후지와라
미치나가나 요리미치 등은 말이죠. 그 헤이안 귀족들이 산으로 올라올 때 아래쪽에 지손인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부터 180개의 조이시가
서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냥 나무 기둥이었는데 나중에 돌기둥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때 미치나가는
정전에 오를 수 있었던 덴조비토로 천황을 보좌하고 있었죠. 그 미치나가가 짚신만 신고 올라가는 겁니다. 가마에서 내려서
걷습니다. 그런 것이 ‘수행’인 셈이죠.
그중에는 14세기 고우다천황이라는 분이 계신데 천황이었을 때는 밖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양위한 이후 상황이 되자
여기저기를 다니게 됩니다. 온천지만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고우다천황은 지손인에서 180개의 기둥이
있는 초이시미치를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고우다천황은 기둥 하나를 마주할 때마다 하나하나의 기둥에 계속해서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밤중에도 했지요. 비가 오고 천둥이
치자 기절을 하기도 하고요. 추위와 피곤함 때문이지요.
그럴 때 신하들이 말이죠. 따라간 신하들은 상황을 모시기 때문에 그야말로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신하들이
“부디 가마를
타소서”라고 말하면 “무슨 말을 하는가. 나는 수행, 홍법대사(구카이)를 따라가기
위해 수행하고 있다. 무슨 그런 불손한 말을 하는 것인가”라며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기절을
하면서도 다음날 해가 뜨면 또 오르는 겁니다. 상황이라는 입장에서 보자면 기둥 하나하나에 절을 하며 걷는 것 자체가 참배인 거죠. 점과 선을 이어서
저쪽으로 가 버리면 끝이라는 것이 요즘의 생각이죠. 차로 쉽게 올라가 절하면 끝이지 않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한 발 한 발 그 길을 밟으면서 올라간다는 것에 사실 신앙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저도 실제로 걸어 보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역시 길을 걷는 그 자체가 수행이 되는 것이죠. 그런 측면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사실 ‘수행·참배길’로 썼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에시마
다나카
말씀하신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장내 웃음)
우에시마
가와사키
이래저래 알아보면서 팸플릿이 많다는 사실과 인터넷에는 세 개의 현에서 각각의 볼거리를 해설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각각 다른 정보들이 너무 많다 보니 오히려 헷갈린다고 할까. 솔직히 조금
다중 행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정말 가 보고 싶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각각의 매력을 담은 양질의 지도 하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가능한 가벼운
짐으로 오르고 싶기도 하기 때문에 다음에는 부디 협력하셔서 앱이나 자료를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참배자로서의 희망입니다.
구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미에현도 하나노이와야나 우부타 신사 등 구마노산잔과 관계가 깊은 장소가 있음에도 현의 경계 때문에 분단된 부분도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귀한 토요일에 이 홀까지 찾아 주시고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고 계시는데요. 그만큼 이 기이
산지가 가진 아주 심오한 무언가를 얻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클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런 부분도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에시마
예를 들면 진무천황이 개국을 해 일본 고대사가 시작되었을 때 구마노가 등장합니다. 또 12세기에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이 일어나 고대에서 중세로 전환되는 시기에 고토바상황이 꿈을 꾸게 됩니다. 꿈을 해석한
결과 이듬해 천하를 가르는 전쟁이 일어난다는 구마노의 신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세계유산이라는 대서특필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웬일인지 천 년 정도의 단위로 구마노가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됩니다. 구키 씨, 원래 구마노에서
참배를 하면 어떤 이로움이 있는지요?
구키
다나카
구키
다나카
요시노 슈겐의 오쿠가케 수행은 요시노강의 미즈고리에서 시작해 메이지시대에 수해가 발생할 때까지는 구마노의 구 혼구신전 뒤를 흐르던 오토나시강에서
끝이 났습니다. 물에서 태어나 물로 돌아가는 것을 슈겐도에서는 의사(擬死)재생이라고 합니다. 간접적으로 죽음을
체험하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무언가 새로운 힘을 얻는 수행 방법입니다.
우에시마
구카이도 산악 수행을 실천했던 사람 중 한 명인데 그곳에 나타난 잡다한 지식의 범람에 위화감을 느껴 중국 당나라로부터 정식 밀교를 직접
들여오려고 했습니다. 804년에 견당사로 당을 방문해 2년 후 귀국, 816년에 고야산 곤고부지를 세우게 됩니다.
많은 위인이 구마노를 찾았는데 구카이가 간 기록은 없습니까?
구키
우에시마
무라카미
(장내 웃음)
구카이가 활동했던 범위는 기노강 수계였습니다. 그런데 구마노는 구마노강의 수계입니다. 강이 다르면
신도 다릅니다. 산의 신이 다르죠. 그렇기 때문에 구카이는 기노강과 이어진 산은 걷지만
구마노 수계 쪽에 있는 산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구마노에는 절대 갔을 리가 없죠. 하지만 덴카와의 벤텐과의 관계 때문에 미센에는 갔습니다.
<신불습합>
8세기 나라시대에 도다이지에 대불이 세워졌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신사인) 규슈의 우사하치만구입니다. 이미 8세기에 신불습합이
이뤄졌다고 생각합니다.
가와사키 씨, 분재는 세계관의 문제다 보니 당연히 신앙이나 종교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분재를 하시면서
일상생활을 포함해 ‘신불이 습합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으신지요?
가와사키
하지만 반대로 신불이 ‘분리’됐다고 느낀 것은, 저는 고등학교부터 사립학교를 다녔는데요. 교토는 종교법인의
사립학교 특히 불교 계열의 학교가 많습니다. 졸업할 때 수계를 받아 계명을 받고 졸업을 한다든지 일주일에 한 번 말씀을 듣거나 종교의 역사와 불교의
역사를 배우는 수업도 하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불교와 신도의 차이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때까지는 불교의 신과 신도의 신을 같다고 보는 가정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두 가지가 섞여 있었는데
학교 교육을 통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에시마
가와사키
우에시마
구키
즉 근본 바탕에는 신도와 불교가 하나이고, 신관이 있고 승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승려가 별도로 구마노산잔의 관리를 했던 적도 있고 19세기에 폐불훼석 운동이 일어나 그 후에는 신과 불이 나눠지게 됐지만 신사로서는 둘을 다르게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에시마
무라카미
(장내 웃음)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는 신불습합이라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절에 갔는데
실제로는 그곳에 신사가 있지 않습니까? 오래된 절일수록 특히 많지요. 그런 것에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는 절도 있지만 헤이안시대 정도에 세워진 곳들은…. 고야산이라면 니후쓰히메 신사, 그리고 히에이잔
덴다이슈라면 히에 신사가 있죠. 잠시 불교에 대해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에시마
(장내 웃음)
남전불교라고 있습니다만, 남쪽에 전해진 버마라고 있지요. 남전 불교의
경전 중에 석존의 ‘지역 신을 모신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지주신입니다.
토지의 신을 모시는 것은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서도 행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도 그 흐름이 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교와 지주신을 모시는 것은 그렇게 이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남전불교설을 통해 보자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카이가 니후쓰히메로부터 고야산을 받아 곤고부지를 세우게 되는데 그게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니후쓰히메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니후쓰히메를 모시지 않고서는 곤고부지가 유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주신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므로 절과 지주신은 한 쌍입니다. 그건 히에샤를 모시고 있는 사이초 역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고야산이
기노강을 따라 세력을 늘려가고 있었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고야산 영지에
편입되었을 때 무엇을 했냐 하면 니후쓰히메 신사를 가져왔습니다. 니후쓰히메를 모심으로써 고야산의 영역이 넓어진다고
할까, 고야산의 힘을 정신적으로도 누르고 있는 식의 관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신불습합은 신앙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서 절과 신사가 하나가 되는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신불습합이라고 하지만 본지수적설이라고 있습니다. 이 신은 아미타의
화신인 곤겐이라고 전해지지요. 그런 본지수적설 역시 신불습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다나카
우에시마
다나카
구마노에서 만행을 한 뒤 버스를 타고 이동해 구마노산잔에서 참배를 하게 되는데, 신도의 신과
불교의 신을 나누지 않고 참배하는 것이야말로 오미네오쿠가케 수행의 세계라고 할 수 있죠. 저는 17번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체험적으로 신불습합은 여전히 이 지역에 남아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것(사진)은 제가 있는 곳의 본존입니다. 1년에 한 번
공개하는데 평상시엔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도쵸라는 막이 앞에 쳐져 있습니다. 자오곤겐이라고
합니다. 본지불(원래의 형상)은 석가모니, 관음보살, 미륵보살로 삼존이 분노의 형상으로 권화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권화라는 것은
가상으로 나타나는, 좀 전에 말씀드린 본지수적입니다. 사진 중앙이
석가모니이고 맞은편 오른쪽이 천수관음보살, 맞은편 왼쪽이 미륵보살입니다. 이것이 각각
권화해서 자오곤겐이라는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곤겐을 슈겐도를 처음 세운 승려 엔노교자가 감득한 것이 긴푸센지의 시작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석가모니도 관음보살도 미륵보살도 사실 외국에서 왔습니다. 하지만 자오곤겐은
엔노교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석가모니, 관음보살, 미륵보살이 나타났는데 악마를 물리치는 모습을 더 깊이 염불하자 오미네의 암석을 깨고 이 세 분의 모습이
자오곤겐의 모습으로 권화했다고 합니다. 즉 그 토지, 그 장소, 그 시대에 맞춰서 신이 나타난 것이 곤겐인 것입니다. 암석을 깨고
나타는 것은 신이지요. 그렇게 보면 석가모니, 관음보살, 미륵보살은 외국에서
건너온 신이지 않습니까. 다른 곳에서 온 신이 일본 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신불습합의
상징적인 존신이라는 슈겐 신앙을 깊이 배우면서 신불습합을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됩니다.
우에시마
구키
나라시대부터 오미네 슈겐의 수행자가 신사를 빈번히 드나들며 수행하고 그곳에서 불교와 신도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본지수적 관념이 정착됐다고
생각합니다.
구마노혼구에서도 게쓰미코노오카미를 모시고 있는데, 그것에 대응하는 것이 아미타불입니다. 현재 신도와
불교를 하나로 설명할 때는 본지불(신의 형태를 한 불)의 이름을 말씀드리고 있어 근저에는 지금도 하나라고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우에시마
그래서 1052년부터 이 세상은 어지럽고 어지러운 혼란의 시기를 맞게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극락이나
정토를 찾아서 우왕자왕했을 걸로 생각되는데 다나카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나카
우에시마
다나카
우에시마
무라카미 씨는 어떠십니까?
무라카미
기본적으로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말법이라는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끝이라는 시기가 도래했다는 사상입니다.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죠. 구제받지 못한다, 깨달음의 길도 없다는 분위기가 기본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가 구원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석가모니가 아니라도 말이죠. 결국 그것이
아미타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고야산에서도 아미타 신앙이 그즈음인 11세기에 유행하게
됩니다.
고야산에 있는 절의 본존에는 지금도 아미타불이 많습니다. 아미타 신앙은 역시 이해하기 쉬우니까요. ‘반드시 임종의
자리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가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말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내용도 이해하기 쉽고 특별한 이론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법 시기에 어딘가에 의지를 해야 했는데…. 그래서 아미타
신앙이 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진언종의 교학에는 그런 말법사상은 없습니다. 즉신성불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에시마
하지만 아마도 영향은 받았겠지요.
무라카미
우에시마
구키
하지만 폐불훼석과 신불분리 때는 절뿐만 아니라 구마노혼구타이샤 역시 본실과 본전에서 아미타여래상을 가지고 나와 불태우거나 구마노강에 버리고
부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구마노혼구는 특히 아미타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그 후 나미 즉 지금의 이자나미, 천수관음의 관음
신앙이 바뀌어가게 됩니다. 구마노산잔 역시 모두 그때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할까, 근본적으로 구마노는
신도이면서도 지금의 구마노를 보면 그 근본에 신불일체를 나타내는 신불습합에서 구마노가 가진 원래의 본질이 새롭게 생겨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나카
그런데 오미네의 수행길에 밀가(秘歌)라는 행자들이 노래를 읊는 장소가 많았는데 이곳에서 아미정토가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동으로 만든 도리이인 홋신몬 근처에서 부른 ‘요시노의 동으로
만든 도리이에 손을 대고 아미정토에 들어가니 기쁘도다’라는 노래가
있는데, 드디어 이곳에서 아미정토로 들어간다는 이 노래를 천 년 단위의 오랜 기간 불러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신앙을 받아들인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우에시마
그렇군요.
무라카미
지금 생각난 건데 아미타 신앙과 연관해 말씀드리자면 육자명호 즉 나무아미타불의 여섯 글자 말입니다. 그 명호를 쓴
판을 구카이가 남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잇펜쇼닌도 고야산으로 아미타 신앙을 들여왔는데 그전에 호넨(겐쿠)의 제자들이
별처에 들어와 나무아미타불을 외웠습니다. 기존의 진언종의 학려들은 종이나 북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단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기에 아미타 신앙이 모든 산에서 상당히 유행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다나카
무덤에서 식사를 한다는 게 그거 아닌가요? 고야산에 무덤이 많지 않습니까?
무라카미
그건 다릅니다.
다나카
다릅니까?
무라카미
구키
아시는 것처럼 지슈 즉 잇펜쇼닌도 구마노를 참배하면서 구마노에서 개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신불신을 고르지 않고 정불정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일체무상을 가지고
패를 나눠줘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었다고 해서 말이죠. 아미타 신앙은
상당히 심오한데 구마노에 있어 중요한 신앙의 발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나카
구마노는 아미정토지요. 요시노에서 오미네오쿠가케의 길을 걷다 보면 마지막에는 구마노의 아미정토가 있습니다.
<마무리>
우에시마
10분 정도 남았는데요. 가와사키 씨가
정리를 좀 해주시죠.
가와사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분재를 처음 본 것은 18살인 고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일본 문화를
알고 싶은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 가운데 처음으로 수령 300년이 넘은 분재를
봤을 때 관점이나 가치 같은 건 전혀 몰랐지만 직관적으로 신령이 깃든 요리시로라고 느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알게 됐다고 할까요. 그때까지 수령 300년이 넘은 나무라고
하면 신사에 있는 신목 같은 큰 나무를 생각했는데 신목이 하나의 화분 속에 담겨 있는 것이 믿기지 않더라고요. 일종의 환영처럼. 연금술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그곳에서 조금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분재를 알면 내가 알고 싶은 일본 문화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떤 시대든 구원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나무는 사람에 비해 생명체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그 수명이 깁니다. 그런 점에서
영원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동경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연과의 일체감을 바랬던 것은 아닐까. 애니미즘이라고
할까. 인간이 최종적으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이해가 됩니다.
우에시마
다나카
한편 1906년에는 신사 합병 칙령에 의해 1914년까지 약 20만 개였던 신사
중 7만 곳이 없어지고 국유지로 몰수되기 시작하고 산림은 채벌되어 민간으로 매각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난의 역사를 이해하고 신도와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관용적이고 융화적인 일본의 종교 풍토를 다시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지시대의 근대화 정책으로 ‘Religion’이라는 일신교적인 가치관의 종교적 개념을 ‘종교’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한 종교 개념이 들어오기
전부터 일본에는 불교와 신도라는 신심(信心)의 세계가 존재했습니다.
일본인이 되돌아가야 할 곳은 메이지 이전의 시대로, 근대의 뒤틀림이 생기기 이전부터
키워온 일본의 풍토, 습관, 신앙심을 되돌아보아야만 미래를 풀어 나갈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의 정신의 바탕을 키워온 다양한 형태의 종교, 창조주를 가지지 않는 종교는
일신교의 종교와는 성립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은 그런 일신교의 가치관이 넘지 못하는 일본만의 다양한 정신 풍토가 남아
있는 귀중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우에시마
구키
우선 신도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신도라는 것은 신의 길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길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츠모데, 오미야마이리, 시치고산 등
일본인이 살면서 행하는 의례 중 하나입니다. 최근 핵가족화로 가미다나도 모시지 않게 되어 신사가 일상과 분리된 듯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신도를 믿는다고
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휴식이 필요할 때나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집 근처 신사를 찾아가 그 땅에 어떤 신을 모시고 있는지를 알고 편안한 마음으로 참배하는 습관을 가져 보셨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신불습합에 대해서인데요. 메이지시대의 신불분리령은 근대화의 흐름을 타고 일본도 서양을 배워 종교를 하나로 하려고 (당시의 정부가) 생각한 것인데, 뜻밖에도 불교가
배척당하고 말죠. 하지만 정책으로 정하기만 해서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죠.
구마노산잔, 고야산, 긴푸센지도 그렇지만 기이반도의 영지에는 그렇게 혼합된 종교가 공존하는데 그걸 형성한 것은 인간입니다. 즉 자연이 먼저
존재하고 인간이 그곳에서 신불을 발견했고, 당시 사람들이 상당히 높은 의식을 가지고 곤고카이, 다이조카이 등
자연 속에서 체계를 만들어 온 것이 오늘까지 계승된 것입니다.
처음에 ‘융합’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세계 각지에서
여러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요시노, 고야, 구마노를 찾아서
이 ‘융합’을 느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수)
신불습합과 관련해 한 말씀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10년 전에 간사이 지방의 큰 신사와 큰 절을 중심으로
이세진구를 특별 참배로 하는 152곳의 신불영지회를 설립했습니다. 저도 거기서
간사를 맡고 있는데요. 지금은 교학 위원장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내년이 설립 10주년입니다. 이를 계기로
많은 분들께 알리려고 노력 중입니다. 신불분리의 시대로부터 드디어 신불습합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는데, 그것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모임이 내년에 1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간토 지방에 계신 분들도 꼭 방문해 주십시오. 한 곳을 돌기 시작하면 갈 곳이 151곳이나 남아
있으니까요.
정년퇴직을 한 부부에겐 시간적 여유가 넘치는 시대입니다. 부인이 “다음에 어디로
갈까?”라고 물으면 남편분들이 곤란해 한다고 하는데요.
(장내 웃음)
사이코쿠 33곳 중 한 곳을 가게 되면 다음 갈 곳은 나머지 32곳으로 정해지게
되니까 33곳에서 끝이 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불영지는 152곳이나 되니
당분간은 어디로 갈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꼭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에시마
그럼 무라카미 씨께 끝맺음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라카미
그리고 사실 가와사키 씨의 말씀에 저도 동감합니다. 분재와도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이념인지
원리인지, 세 가지 정도 말씀해 주셨지요.
하나는 자연에 대한 경의,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자연을 본다는 것이죠. 자연은 재료가
아닙니다. 생명을 주는 존재입니다. 자연에 대한 경의는 분명히 이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에 살아 있고 각각의 종파에도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연장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죠. 자연의 생명
연장은 또한 인간의 생명 연장을 말하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자연이 살아 있는 인간 또는 동물들을 키워 줍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와사키 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거목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것 역시 우리의 종교적 세계관과 연관이 있는 부분입니다. 분재라는 작은
것을 보고 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기이 산지와 공통되는 부분을 설명해 주신 가와사키 씨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에시마
감사합니다.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의 본질을 고찰한다’라는 대단히
큰 논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가 있으실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찾아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출연해 주신 여러분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박수)